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(문단 편집) === 성공한 경우 === >총검만 들고 돌격하면 중국군은 도망갑니다. 아니, '''도망쳐준다고나 할까요''', 아무튼 도망가버리는 겁니다. >---- > - NHK다큐멘터리 '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고' [[과달카날 전역|과달카날 편]] - 청일전쟁 ~ 중일전쟁 초기까지의 [[청나라]] 군대와 [[중화민국군|중국군]]에게는 이게 아주 잘 통했다. 아무나 용병으로 모아서 쓰던 청군은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힘겨워했고, [[붕괴 후 혼란기|청조 붕괴 이후 상황이 더욱 막장으로 치달은]] 1930년대의 중화민국군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노력했다. 당시의 중화민국군이란 것은 사관학교, 부사관학교, 육군훈련소를 통해 양성된 정규 군인이 아니라, 장교라고 해본들 전체 중국군의 75%가 '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'들이었으니 나름대로 훈련을 받고, 엄격한 규율을 유지한 일본군이 칼 빼들고 '반자이!' 돌진하면 겁먹고 알아서 무너져버린 것이었다. [[장쭤린]]-[[장쉐량]] 부자가 지배하던 만주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가장 공업화가 잘된 곳이었고 상태가 좀 멀쩡한 곳이었지만 일본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학량(장쉐량)의 소극적 대응 때문에 앉아서 망했고, 이후 기찰정무위원장 [[쑹저위안]]을 비롯한 많은 군벌이 이런 이기적이고 소극적 태도로 자멸했다. 그도 아니면 산동 군벌 [[한푸쥐]]나 광동 군벌 [[위한머우]]처럼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[[옌시산]]처럼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서 단독 협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. 허수아비 같은 오합지졸을 상대로 계속 이겨대던 일본군은 당연히 반자이 돌격에 재미가 들려서 청일전쟁 이후로 30년간 지겹도록 써먹었다. 그리고 당시의 중국군은 청조가 멸망하고 난 후로, 지역 군벌들이 날뛰던 때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군대로 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. 또한 [[태평양 전쟁]]의 초기에는 동남아시아의 미군 및 네덜란드군, 영연방 식민지군은 본진에 신경 쓰느라 '조그만 섬나라 황인종쯤이야'라는 생각을 가졌고, 최소한의 장비와 인원만을 갖췄을 만큼 준비가 부실했던 병력들을 상대로 이기며 정신력으로 [[귀축영미]]를 처단하는 무적 황군의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했다. 다시 말해서 후방 부대나 치안유지용 [[준군사조직]], 식민지군 상대로 정예부대를 투입해서 이겨 놓고는 [[정신승리]]를 한 것이었다. [[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]]로 인해 징집된 [[일본계 미국인]]들도 독일군에게 반자이 돌격을 한 적이 있었는데, 그 짓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던 나치 독일군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. 물론 엄연한 [[미군]]의 일원이었던지라 돌격 중 반자이를 외쳤을 뿐이지 미군 교리대로 싸웠다.[* 부연하자면 이 '유럽 전선에서 반자이 돌격을 실행'한 소대가 바로 [[김영옥(군인)|김영옥]]이 지휘하던 부대로, 소대장이 스스로 기관총 진지를 무력화하려다 총에 맞고 쓰러지자 자발적으로 돌격했다고 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